“모세는 살해당했다? - 프로이드에 대한 창조적 오독(誤讀)이 필요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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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임마누엘한인연합감리교회 댓글 0건 조회 333회 작성일 22-09-18 02:50본문
우선 제목으로 어그로를 끌며 시작해 보고자 합니다. 위 이야기는 제 말이 아니라 〈모세와 유일신교〉라는 프로이드의 후기 저작에 나타난 흥미로운 주장입니다. 그리스의 비극 〈오이디푸스 왕〉을 해석하며 프로이드는 유명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라는 개념을 소개했지요. 자신의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한 오이디푸스 왕에 대한 신화를 해석하며 프로이드는 “아들이 아버지를 증오하고 어머니에 대해서는 무의식적인 성적 애착을 갖는다”고 해석했습니다.
프로이드는 이후 〈토템과 타부〉 〈모세와 유일신교〉를 통해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개념을 종교와 문화 전반을 해석하기 위한 지평으로 확장합니다. 여기서 제가 생각하는 중요한 원리는 ‘부친살해의 모티브’입니다. 중요한 점은 부친을 살해했는지 안 했는지의 여부가 아니라, 부친을 살해하려는 욕구가 죄의식을 낳았다는 점입니다. 부친에 대한 원망의 마음이 커져 살해의 욕구를 가지게 될 때, 그 안에 있는 상반되는 감정, 바로 아버지에 대한 사랑이라는 양가적 감정이 자신에게 죄책감을 가져다주는 것이지요. 따라서 프로이드에 따르면 부친살해의 욕망은 아버지를 제거하는데서 끝나지 않고, 오히려 부친을 더욱 더 강력하게 내면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오게 됩니다. 그리고 내 마음 속에 내면화된 부친은 나의 행위를 감시하는 에고의 일부가 되어버립니다.
〈모세와 유일신교〉라는 후기의 저작에서 프로이드는 이스라엘의 영적 율법적 아버지와 같던 모세가 백성들의 반란에 의해 살해당했다고 해석합니다. 모세를 존경하며 동시에 원망하던 백성들은 아버지와 같은 그를 살해함으로써 오히려 더 큰 죄책감에 빠져들게 됩니다. 그 이후 유일신이었던 야훼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계약을 중재했던 모세를 더욱 신성시 하며, 출애굽 이후 이스라엘을 움직이는 내적 원리로 율법이 강조되기 시작합니다. 아버지 모세를 살해했지만, 그의 정신은 더욱 내면화되고 신성시 되었다는 것이지요. 아버지를 죽이며 아버지를 내면화 할 때, 그 죄책감이 문화와 문명을 발전시키는 원리가 되었다는 프로이드의 탁월한 문화비평이 여기서 드러납니다.
제가 프로이드의 ‘모세 살해설’을 동의하는 것은 아니고, 그의 해석을 문화를 해석하는 이론적 틀로 인용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프랑스 혁명에 적용하면 “짐이 곧 국가”라는 봉건제의 몰락이 루이 16세를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지게 함으로써 시작되었는데, 프로이드식으로 해석한다면 “중세의 아버지와 같은 왕을 살해함으로써 중세의 몰락을 알린 프랑스 혁명은 그 왕의 죽음을 내면화 하며 근대주의와 민주주의를 발전시키는 정신적 원리를 얻게 되었다”고도 설명할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교회가 싫어하는 학자 프로이드를 굳이 인용하면서 이야기를 진행해 온 이유는 ‘부친살해의 경험’에 대한 창조적인 오독(誤讀)이 필요하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미국의 저명한 문학비평가 해롤드 블롬이 역사를 움직인 창조적인 사상가(그의 표현대로 ‘강한 시인’)는 때로 저자의 의도를 창조적으로 비틀어 해석하기도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저는 그것을 신학적으로 ‘우상의 몰락’이라고 표현하고 싶습니다. 부친은 절대적인 권력입니다. 그 권력을 절대적으로 선망하며 불편해 하는 아들은 부친의 권위를 뛰어넘고 독립하며 성인이 되어갑니다. 교회의 역사를 보더라도, 살아있는 교회의 아버지 ‘교황의 권위’를 제거하며 교회는 ‘종교 개혁’을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 아닌 존재가 이렇듯 부친의 자리를 차지할 때, 그 우상을 제거하는 ‘우상의 살해’로부터 ‘진리(眞理)’는 새로운 시대에도 받아들여질 수 있는 새로운 ‘일리(一理)’로 살아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연합감리교회(UMC)가 동성애에 대한 견해차로 촉발된 교단의 분리 문제로 진통을 앓고 있습니다. 미국에 와서 연합감리교회로부터 파송 받아 목회하면서 은연중에 목회자와 평신도들에게 내재화 되어있는 원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연합감리교회를 개혁되어야 할 ‘지상의 교회’가 아니라 이미 완성된 ‘천상의 교회’처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완성에 대한 자신감에 가득 찬 우리의 교만함을 우리는 이곳에서 경험하기도 했습니다. 동성애를 반대하던 애틀란타 대형교회의 목회자들을 “장정을 지키지 않았다는 죄목”으로 징계한 감독은 오히려 장정에 있는 ‘동성애’에 대한 규정을 공개적으로 지키지 않고 있습니다. 중세 카톨릭 교회의 몰락을 알렸던 ‘교황 무오설’이 우리 교단에서든 ‘감독 무오설’로 둔갑해 나타나고 있는 것이지요.
저는 연합감리교회가 살아남기 위해 아버지를 죽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 아버지가 아닌 것들이 아버지의 자리를 대신하는 우상의 시대라면, 우리의 성숙과 성장을 위한 가슴 아픈 단절과 탈우상화의 노력들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부친살해의 욕구를 문화 발전의 과정으로 이해했던 프로이드의 문화비평을 우리의 가슴 아픈 성장을 위한 창조적인 오독으로 읽고 싶습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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